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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이 담낭암을 앓고 있다가 화요일 새벽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78세였습니다.

1945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그는 김해와 마산에서 자랐습니다. 1970년 서울대 법대 재학 중 전태일의 자해를 발견하고 50여 년 동안 학생 운동과 정치 활동에 전념했습니다. 학생 시절에는 여러 가지 위기 상황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서울대 학생들에 대한 반란 음모, 민청학련 사건, 청계산 위장 노조 사건 등으로 9년간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12년 동안 공안 당국의 수배와 추적을 받았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40대 장기표는 김근태, 이부영과 함께 재야를 이끌었던 '트로이카'였습니다. 하지만 그 후 그의 정치 경력은 파멸했습니다. 1992년 이재오, 이우재 등 저명한 정치인들과 인천지역노동연대 등 일부 노동운동가들이 연합하여 결성한 국민의당에서 서울 동작갑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이를 포함해 장 후보는 평생 7번이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려 했지만 모든 선거에서 낙선했습니다. 그는 세 번이나 출마를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완주에는 실패했습니다.

출마해 낙선하고 당을 결성해 탈당했지만 제도권에서 안정적인 자리를 차지한 적은 없습니다. 과거 이력 때문에 그는 "영원한 재야"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항상 "주류 세력"과 불화를 겪은 것은 아닙니다. 통합민주당과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의원직에 출마했다가 나중에 국민의힘의 전신인 미래통합당의 공천을 받아 총선에 출마했습니다.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과도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직선제 개헌 이후 1987년 실시된 대선 캠페인에서 그는 지역감정 극복을 명분으로 김대중을 지지하는 편에 서서 김영삼 지지자들의 후보 단일화에 맞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선 과정에서 김대중 캠페인이 제안한 '4자 필승론'을 언급하며 김대중을 지역주의의 원조라고 맹렬히 비판했습니다.


그는 민주당이 배출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했습니다. 그는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공허한 말과 정치를 바탕으로 스타가 된 정치인이라고 경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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